지난해부터 언론에 자주 등장한 '가난한 대학생'은 꼭 2년 전의 내 모습이다. 대학 시절 과외, 패스트푸드, 피자집, 호프집 서빙, 논문 번역 등으로 한달에 50만원 내외를 벌었던 나는 대학 4년 + 휴학 1년, 그 5년 내내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돈을 아끼려던 내 전략은 지금 돌아봐도 참 기가 막혔다. 하루 식비를 7000원으로 제한해 아침은 편의점이나 학교 매점에서 빵+우유 조합 또는 삼각김밥 + 음료 조합으로 때웠고, 점심은 학생회관의 2500원짜리 메뉴 (절대 3000원짜리는 먹지 않았다), 저녁은 편의점의 컵라면+삼각김밥 세트나 1500원짜리 떡볶이, 김밥, 주먹밥 등으로 해결했다. 이렇게 식비를 지출하고 나면 남는 생활비는 20~25만원 정도였는데, 그 돈으로는 친구들과의 밥값이나 술값, 동아리 활동, 필요한 생필품, 핸드폰 요금, 교통비 등을 대고 나면 동이 났다.
그래서 여대생이라면 누구나 하나쯤 있는 '예쁜 것'이나 '좋은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친구들이 이름있는 브랜드의 옷과 가방을 백화점에서 사 입을 때 나는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싸구려 옷을 사다 반년 입고 버렸다. 친구들이 파우치에서 바비 브라운, 랑콤 등 듣도보도 못한 브랜드의 별의별 화장품을 꺼내들때 나는 저가화장품 매장에서 산 파우더 내지는 립밤 정도를 아끼고 아껴서 썼다. 자연스레 중산층 이상 되는 친구들과의 모임은 피하기 시작했고, 그런 친구들과 만난다 해도 불편한 느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래도 그런 친구들이 부모님에게서 받은 용돈을 아까운 줄 모르고 펑펑 쓰거나 부모님의 카드를 삭삭 긁어댈때 난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내가 번 돈으로 생활하는게 어디냐며 스스로를 토닥거리곤 했다.
그저께 동아리 활동을 함께하던 언니의 결혼식에 갔다. 결혼식에서 오랫만에 만난 동아리 친구들의 모습은 다들 예뻤다. 저마다 직장인이 되었거나 고시를 패스해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각자 예쁜 정장 한벌씩 입었고, 명품은 아니더라도 이름 있는 브랜드 가방을 들고 있었으며, 파우치에는 고가의 화장품이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 친구들과 함께 단체사진을 찍는데, 내 모습이 이렇게 초라해 보일 수가 없었다. 귀엽고 예쁘긴 하지만 정장과는 저만치 멀리 떨어져 있는 캐주얼한 갈색 코트에, 스타킹도 아닌 회색 레깅스를 신고, 동네에서 산 5만원짜리 캐주얼 크로스백을 매고 있는 내 모습이란...사진을 찍는 순간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에 어쩔 줄을 몰랐다.
그리고 어제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니 그제의 충격은 부끄러움으로 변해 있었다. 종로의 한 커피숍에서 마주앉은 친구는 내가 내 스스로에게 해야 할 말을 대신 해 주고 있었다. "넌 왜 고등학교 때나 대학교 때나 지금이나 똑같니... 브랜드 가방이 수십만원짜리이기는 하지만 너를 위한 선물로 하나 정도 사 두는 것도 좋단다. 우리 나이 정도 되면 월급이 넉넉하진 않더라도 다들 피부 관리도 받고, 비싼 옷이나 가방도 사고, 화장품도 좋은 걸로 산단다." 그리고 친구와 함께 잡지책을 펼쳐봤다. 나는 생전 처음 듣는 온갖 명품이며 브랜드 이름을 친구는 줄줄 꿰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난 벌써 27세 직장인이다. 조금 억지를 부리자면 이십대 후반이다. 그런데 난 아직까지도 한달 50만원을 근근히 벌어 먹고살던 대학생 때의 소비패턴을 그대로 가지고 살고 있었다. 동네를 돌아다니며 저렴한 니트와 바지, 구두와 가방을 찾아다니고, 저가 화장품 매장에서 산 화장품을 1년 가까이 쓰고, 데이트를 해도 밥값으로 3만원을 거의 넘기지 않는다. 그나마 달라진 점이라면 더이상 강남역 지하상가에서 오천원짜리 티셔츠를 사 입지 않는다는 것 정도? 하지만 남들 다 하나쯤 갖고 있는 브랜드 가방 하나 없고, 백화점에서 파는 화장품 같은 건 듣도보도 못했고, 결혼식에 입고 갈 옷이 없다는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
친구와 헤어지고 난 뒤 바로 백화점에 들렀다. 당장 다음 주 있는 회사 선배 결혼식에 입고 갈 원피스를 한 벌 샀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체크카드를 들고 13만원을 긁었다. 8만원짜리 러브캣 명함지갑을 3만원에 팔길래 냉큼 '득템'한 건 다행이었다. 그리고는 동네로 와서 5만원짜리 수분크림 세트를 샀다. 그런데 원피스를 한 벌 사고 와서는 또 동네 옷가게를 돌아다니며 혹시 더 저렴하고 예쁜 원피스가 있는지 살펴보고, "이건 체형 커버가 안돼, 저건 디자인이 안 예뻐... 그래, 보세옷은 백화점 옷보다 질이 안 좋아"라며 마음을 달래고 있었다. 그리고 5만원짜리 수분크림은 혹시 언니가 보고 타박을 할까봐 책상서랍에 숨겨뒀다. 아, 이런 찌질함이란...
난 나이에 비해 뭐든 늦다. 특히 가장 늦은 게 소비패턴이다. 굳이 사치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에 대한 투자는 어느 정도 필요한 건데, 난 지금까지 "나 답게 살자"면서 이 나이대 사회생활하는 여성이 해야 하는 기본적인 투자도 안 하고 있었던 것 같다. 뭐 지금부터라도 조금씩 해나가면 될 거다. 그래봤자 내가 얼마나 사치를 한다고. 그래도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찌질하게 살아왔던 걸 너무 타박하지는 말자. 대학 시절 예쁜 것 안 사입었던 건 부모님께 손 안 벌리고 알바를 하며 살았기 때문이니까. 그리고 지금부터 살 옷이며 화장품 등도 내가 열심히 일해서 받은 월급으로 살 것이지, 결코 남자친구에게 사달라고 조르지는 않을 거니까. 결론은 지금까지 난 열심히 살았다는 것이고 앞으로도 열심히 살 거라는 것. 그리고 열심히 살고 있는 나에게 괜찮은 선물 하나 해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는 갖겠다는 것. 수고했다! 앞으로도 수고하자! 토닥토닥.

